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77화 저벅 저벅. 이미 브로데릭의 요새 앞은 신성연방의 군대가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밤바람에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고, 불타는 횃불과 솟아오른 창이 보인다. 그 수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방대한 병력. 연방의 수도인 하늘섬 내부에 이 정도 규모의 군사가 동원되었다는 것부터가 예외적인 일이었다. “심판의 성녀께서 입장하십니다!” 호화로운 마차 문이 열리고 다나가 걸어왔다. 병사들과 팔라딘들 모두 무릎을 꿇거나 검례를 취했다. 이내 군세의 가장 앞으로 온 다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마차에서 따라 나온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총무주교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심판의 성녀님께서 친히 오셨다. 요새의 주인인 브로데릭 교수는 나오라.” 끼기긱— 그 말이 끝나기 무섭기 요새의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중간에 서 있는 브로데릭, 오른쪽에는 가휀, 그리고 왼쪽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시몬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 다나와 총무주교도 병사들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전쟁을 앞두고 열리는 마지막 협상 테이블. 이내 두 진형의 인물들이 마주 보고 섰다. “위대한 여신의 딸을 뵙습니다.” 간략히 다나에게 예를 취한 브로데릭이 고개를 돌려 총무주교를 바라보았다. “흠흠, 이게 다 무슨 소란입니까? 총무주교.” “하늘섬에 악마 토벌전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들으셨겠지요? 브로데릭 교수.” 총무주교는 가휀이 합류한 건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눈길만 한번 준 후, 다시 브로데릭과 대화했다. “악마 ‘리사라’를 찾아내기 위한 요새의 수사를 진행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시지요.” “한 가지 정정하겠습니다.” 브로데릭이 고개를 치켜세웠다. “악마가 아니라 성녀님이십니다.” 웅성 웅성! 병사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프넬 교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다. 총무주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브로데릭 교수. 정녕 당신이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제 믿음이 주교께 다 전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브로데릭이 두 손을 모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개등>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그의 몸에서 산더미만 한 신성이 방패의 형상으로 일어나더니 웅장한 성벽의 형태를 이루었다. 광활한 벽이 신성으로 빛나며 굳건히 버티는 모습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거대한 압박이 되어 전 병력을 내리눌렀다. “위대한 어머니 앞에서 신앙을 걸고 맹세합니다. 나 브로데릭은 리사라 성녀님이 진정한 성녀임을-” 그의 입꼬리가 꿈틀댔다. “진실로 믿사옵니다.” 웅성 웅성 웅성 웅성! 전 병력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수 군마들이 히히힝!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고, 몇몇 팔라딘들은 강한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명예 높은 브로데릭의 선언에 벌써부터 경미하게 신성 슬럼프의 증상을 호소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브로데릭 교수!” 총무주교가 이를 빠드득 갈더니 고개를 돌려 가휀을 바라보았다. “설마 가휀 교수도 같은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가휀 또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맞잡고 ‘개등’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신성이 연꽃 모양으로 피어나오더니 주위로 퍼져 나가 무수한 연꽃을 개화했다. “위대한 어머니 앞에서 나 가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리사라 성녀님이 진정한 성녀임을 믿사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역 에프넬 교수 둘이 이탈한 것이다. “……악마에게 씌었구나.” 총무주교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동요하지 마라! 이자들은 이미 악마에 씌었다! 그녀의 간악한 혓바닥에 넘어갔다!” 스릉! 스릉! 총무주교의 외침에 맞춰, 팔라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하늘로 세웠다. “위대한 어머니의 뜻은 우리에게 있나니! 여신께서는 악마를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토벌하길 원하신다! 우리를 방해하는 반역자들을 전부 처단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모든 성기사들과 병사들이 검과 창을 높게 들어 올리며 신성을 개방했다. 두 세력의 신성이 피어올라 격돌하며 세상이 일순 하얗게 번쩍였다. 믿음과 믿음의 격돌. 어느 한쪽은 깨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기어코 험한 길을 가는구나.” 문득 뒤에서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에, 총무주교가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절그럭. 절그럭. 은백의 갑주를 입은 홍색 머리의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성녀들이 흔히 두르는 성의나 화려한 의상이 아닌, 전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끈한 디자인의 평기사들이 입는 일반적인 갑주. 그러나 입고 있는 사람이 빛났다. 불꽃 같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붉은 립스틱이 대비된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절도와 위압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등 뒤에 걸친 망토가 휘날리고, 신성과 마나가 그녀를 편애하는 것처럼 휘감긴다. 신성연방 최강의 성녀, 다나. “아직 늦지 않았다. 브로데릭, 가휀.” 걸음을 멈춘 그녀가 두 교수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그대들의 반역을 없던 일로 해주마.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상, 반대편에 누가 있건 무의미하다.” “제 믿음을 다시 거짓으로 덮으려 하십니까.” 브로데릭이 예를 취했지만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차라리 목을 치신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자넨 늘 감정적인 선택이 문제였어. 브로데릭.”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가, 이내 왼쪽에 뻘쭘하게 서 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눈을 마주친 소년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었구나.” 그녀가 갑자기 다가왔다. 당황한 브로데릭이 막으려고 했지만, 가휀이 괜찮을 거라며 팔을 붙잡았다. “10번 유클리드.” 그러고는 천천히 시몬의 후드를 벗겨서 얼굴을 드러내게 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나를 기억하겠지?” 시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기쁘구나’ 하며 답했다. 시몬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도서관에서 만난 그 여자가 심판의 성녀였냐고!’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심판의 성녀 자체를 지금 처음 보는 거니 어쩔 수 없었지만. 착. 그녀가 품속에서 얇은 시가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그것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불을 붙이더니 입에 물었다. “가엽구나. 일개 선발생이 어쩌다 이런 일에 끼게 됐느냐?” 선발생? 아직도 내 정체를 모르는 건가? 충분히 보고가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 얼굴이 창백해진 총무주교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 시몬이 얼어 있는 가운데, 그녀가 시몬의 턱을 붙잡더니 품평하듯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역시 얼굴은 내 취향이 아니다만.” 빠직. 웃고 있는 시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끌리는구나. 무엇보다 이 가짜 얼굴.” 턱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끝이 시몬의 뺨을 스르륵 쓸었다. “이 얼굴 가죽을 벗기면 무엇이 나오는 거지?” “…….” “너는 나를 위한 선물 상자 같구나. 무의미한 반역은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내 것이 되어라.” 그때 시몬이 손을 뻗어 다나의 손목을 강하게 착! 붙잡았다. 졸지에 손목이 잡힌 다나가 시가를 문 채 눈을 깜빡였고, 뒤쪽에서 팔라딘들과 총무주교들이 기겁하며 무기를 붙잡았다. “가장 가까운 딸의 뜻을 따를 수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째서지?” 시몬이 다나의 손을 내리게 한 뒤, 두 손을 맞부딪히며 답했다. “저는 레테 성녀님의 수사관입니다.” 스으— 다나의 눈매가 싸늘해지더니 뒤쪽의 총무주교를 돌아보았다. 총무주교의 얼굴빛이 까맣게 변했다. “그래, 레테의 것이었군.” 그렇게 중얼거린 다나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망토가 타오르는 불길처럼 휘날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입가에 문 손가락 사이로 시가를 낀 채 후우 연기를 내뿜었다. “오늘 레테를 죽일 이유가 하나 생겼구나.” “……!” 이내 걸음을 멈추더니, 시몬을 돌아본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아이를 죽인 뒤, 내가 너를 취하겠다.” ‘무슨 소리야 저게.’ “나는.” 그녀의 동공이 일렁였다. “손에 넣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하거든.” 그녀가 이내 돌아갔고, 시몬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덮었다. ‘아, 뭔가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린 느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브로데릭이 오른 손을 꾸욱 말아쥐었다. “……놀랍군, 이번엔 심판의 성녀까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다 내 딸아!” “? 자네 방금 뭐라고?” “허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휀 교수.” 결국 협상은 결렬. 양쪽 협상단 모두 뒤로 물러났다. 이제는 전투만이 남았다. 다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상하군, 그 흉측한 리사라를 성녀로 추대할 수 있다고 여기다니.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성녀님, 돌입 준비하겠습니다.” 총무주교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옆으로 착 다가왔다. “주교.” “예.” “이리와라.” 다나가 손짓하자 총무주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더 가까이.” 다나가 재차 손짓하자 총무주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다나가 제 손을 총무주교의 입안에 쑤셔 넣더니. 뿌드드드득!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대로 생니 하나를 힘만으로 뜯어냈다. 이빨이 텅 비고, 강제로 돌려 뜯어내는 바람에 잇몸이 뒤틀려 버린 자리에서 끝없이 피가 콸콸 쏟아졌다. 끔찍한 광경에 몇몇 병사들이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보고할 정보를 자네의 판단에 따라 숨겼지?” “끄윽! 끅!” 하지만 총무주교도 독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기립 자세를 유지했다. 다나가 뽑아낸 이빨을 바닥에 던진 뒤, 회복하지 못하도록 구둣발로 짓밟아 부숴버렸다. 다나가 피로 뒤덮인 손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인내심이 한계구나. 네겐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그녀가 피 묻은 손수건을 휘하 팔라딘에게 돌려놓은 뒤 말을 이었다. “그 소년을 내 앞에 산 채로 데려와.” 끄덕 끄덕. 총무주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물러났다. 이내 다나의 곁에 있던 팔라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진형을 갖추라!” 전군의 병력이 창칼을 앞세우며 요새에 돌진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펄럭! 다나가 팔을 한 차례 크게 휘두르자, 그녀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좌우로 크게 물러났다. 스릉! 드디어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얀 검을 양손에 모아쥔 뒤, 무릎을 굽히고 칼끝을 뒤로 보낸 채 참격의 자세를 취했다. 팔라딘들은 익숙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병사들은 다소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요새가 저렇게 멀리 있는데 뭘 하시는 거지?” “저, 저기 봐! 달이……!” 하늘에 뜬 달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게 무슨 착시인가 싶어 눈을 비비며 지켜보았다. 이내 서서히 내려오던 달이 다나가 세운 검 끝에 맞닿는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검 끝에서 어마어마한 신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광풍이 몰아치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검을 붙든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위로 치솟으며 입고 있는 갑옷이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저게 무슨……!” 마치 달에 닿아 있듯, 그녀의 검이 형언하기도 힘들 만큼 길어졌다. 검신의 중간에 피어 나온 신성이 거대한 은하를 형성하듯 비대해졌다. “전군.” 그녀의 어깨가 움직였다. 검 끝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의 달 또한 움직인다. “진격하라.” 쏟아지는 빛의 무리가. 요새에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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