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17화 에이젤의 힘으로 왕도까지 도달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다만 도착하기 무섭게 에이젤은 칠흑 고갈 증상을 드러내며 쓰러져 버렸다. “모, 못 움직이겠어.” 익숙하지 않은 천년향의 마나와 대기에 적응하면서, 바람의 길을 직접 깔며 세 사람을 이동시킨 탓에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뒤는 저희에게 맡기세요!” “고맙다, 에이젤.” 시몬과 카쟌은 쓰러진 에이젤의 손에 자신들의 주먹을 툭툭 쳐주고는 바로 궁궐로 향했다. 천년향 왕도는 사뭇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천도제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하긴 했지만, 이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성문 앞은 경비가 삼엄하고, 성벽은 높군.” 성문 앞에 ‘금군’들이 배치된 모습을 본 카쟌이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잠입할 거지?” “세르네가 알려준 포인트가 있어요.” 시몬과 카쟌은 성벽을 따라 빙 돌며 이동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세르네의 기억에서 본 위치를 딱 찾아냈다. ‘여기가 맞아.’ 주변 환경도 완전히 일치했다. 시몬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성벽을 따라 천천히 긁으며 걸었다.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며 긁히던 나뭇가지가 어느 순간 안으로 쑥 하고 들어갔다. 세르네가 흑마법으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 뒤, 환상마법으로 그곳을 감춰둔 듯했다. ‘음.’ 다만 환상 때문에 이쪽에서도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왕궁 경비병들의 눈에 띌지도 몰랐고, 그렇게 되면 속도전이었다. “준비됐죠?” 시몬이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얼마든지.” 카쟌도 무릎을 굽혔다. 이내 두 사람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성벽으로 돌진했다. 우웅-! 웅!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돌진했지만,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걸음을 멈춘 시몬이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궁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 도착한 위치도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이었다. 안심한 카쟌이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성벽에 구멍을 뚫을 정도라면, 세르네 아인다르크도 이미 여기 어딘가에 잠입해 있단 뜻이겠군. 그녀와 합류해야 하지 않겠나.”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르네가 약속 장소를 딱히 정하진 않았어요.”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세르네가 기억 속에서 본 곳으로 이동해 보죠. 우리가 그쪽으로 올 걸 알고 있을 테니, 움직일 수 있다면 세르네도 그리로 올 거예요.” “그러지.” 지금으로서는 세르네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시몬이 달리기 시작했고, 카쟌이 뒤를 따랐다. ‘조용하네.’ 궁궐 잠입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사람들이 종종 정원을 지나다녔지만, 건물 뒤로 몸을 숨기고 이동했기에 그들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첫 난관이 생겼다. “흠.” 건물 그늘에 몸을 숨긴 시몬이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다음 건물까지의 거리가 꽤 됐고, 그 구간은 탁 트인 개활지였다. 시몬이 뒤따라오는 카쟌에게 말했다. “반대편 건물로 뛰어 들어가죠. 5초를 세면 뛸게요.” “알겠다.” 시몬이 막 첫 번째 숫자를 세려는 그때. 벌컥! 갑자기 건물 뒷문이 열리며, 시종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두 남자가 멈칫했고, 카쟌이 손에 힘을 주었다. “기절시키겠다.” “잠시만요.” 시몬이 카쟌을 제지했다. 시종은 똑바로 시몬과 카쟌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카쟌이 손에 힘을 준 채 잔뜩 경계하고 있는 그때. 스윽- 시종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시몬과 카쟌을 지나쳐 뒤쪽 화단에 갔다. 그러곤 조용히 물뿌리개를 들어 물을 주기 시작했다. 카쟌이 맥 빠진 얼굴로 팔을 늘어뜨렸다. “……뭐지?” “오는 길에 말씀드렸잖아요. 세월에 잠식당한 거예요.” 천년향 주민 중에서는 세월에 대한 부감감을 이기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현실의 흐름에 몸을 맡겨 하루하루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원사도, 궁녀도, 조리사도. 모두 거의 감정 없는 인형처럼 똑같은 하루 일과를 수행하고 있었다. 시몬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짚었다. “분명 왕도는 천년향 전체에서 가장 상황이 괜찮은 곳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설마 왕이 사는 궁궐까지 이럴 줄은…….” “사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가 보군.” 카쟌이 눈 밑에 난 상처를 슥슥 긁으며 중얼거렸다. 시몬이 다가가 화단에 물을 주는 시종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역시나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몬은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도 조금 힘을 빼고 가보죠.” 두 사람은 궁전의 근무자들이 입는 겉옷을 찾아 걸치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워낙 주변에 잠식자들이 많았으니 그들의 흉내를 내며 섞여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이 궁궐에서 가장 큰 건물이자, 세르네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다. 입구로 들어가기에는 퍽 위험해 보였기에 두 사람은 칠흑을 밟고 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으로 통과했다. ‘아.’ 그런데 웅장했던 건물의 내부는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식자도 보이지 않고, 애초에 인기척도 없었다. 시몬은 세르네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을 찾았다. 건물 깊은 곳으로 들어설수록 공간도 어둡고 먼지가 쌓인, 햇빛이 들지 않는 영역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저 문이네요.” 마치 왕궁의 무언가를 숨기듯 외진 장소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문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섯 명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카쟌은 예리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경비병의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가 매여 있다.” 그가 주먹에 칠흑을 끌어올렸다. “이번에야말로 무력으로 열쇠를 탈취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잠깐만요.” 시몬이 조용히 손바닥에 감정을 조종하는 저주 마법진을 만들었다. 악수에 성공한다면, 저주의 힘으로 상대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란 없이 들어가는 게 최선이니, 한번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카쟌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몬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실례합니다.” 다섯 명의 경비병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다섯 명 모두가 정확히 일정한 동작으로 창끝을 내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잠깐만요! 문을 통과하겠다는 게 아니라요. 저는 벽운지 태수님의 지시를 받아…….” 문답무용. 화아아아아악! 창끝이 시몬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시몬이 급히 고개를 돌려 창끝을 피해냈다. ‘이건……!’ 설마설마했지만,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마저 세월에 잠식되어 있었다. 자신이 지키는 것에 접근하면 누구든지 공격하는 것 같았다. “물러서라!” 카쟌이 벽을 타고 뛰쳐나와, 멋들어진 동작으로 경비병 두 명의 얼굴을 차올렸다. 경비병들이 턱이 함몰된 채 무너져 내렸지만, 바로 노란색 실이 일렁이는 효과가 일어나더니 회복되어 버렸다. 천년향 생물의 특징인 ‘수복’이었다. “여긴 내가 맡지.” 카쟌이 경비들의 틈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천년향의 경비병들도 마나를 다룰 줄 알았고, 모든 공격이 살벌했지만, 카쟌은 특유의 괴이한 움직임으로 피하고 있었다. 팔이 360도로 꺾이고, 허리가 고무처럼 비틀어지며, 경비병들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온 그가 차례차례 적의 뒷목을 가격했다. 퍽! 꽈득! 마구 내질러지는 창끝을 자유자재로 피하며 주먹으로 하나하나 격파하는 카쟌의 모습은 대단히 화려했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구는 경비병들도 순식간에 상처를 수복해서 다시 달려들었다. ‘이대론 끝이 없어.’ 시몬도 그를 돕기 위해 뛰어나가는데, 어느샌가 카쟌이 무언가를 그에게 던지고 있었다. 경비병의 허리에 매여 있는 열쇠 꾸러미였다. “나이스!” 시몬은 열쇠 꾸러미를 붙잡은 채 달려가 빠르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열쇠가 스무 가지가 넘어서 일일이 대조해 봐야 했다. “서둘러라 시몬!” 벽에 몰린 카쟌이 창끝을 연이어 피하며 말했다. 그가 급히 자세를 낮추자, 벽에 쾅쾅쾅! 하고 창들이 연달아 박혔다. 카쟌이 그 자세에서 바닥에 손을 짚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몸을 회전하며 경비병들의 다리를 쓸어 넘겼다. 달칵! 카쟌이 홀로 무쌍을 발휘하는 사이, 시몬도 성과가 있었다. 열쇠 하나가 들어맞으며 마침내 문이 열렸다. “이제 됐어요! 들어와요!” 쿠구구구! 생각보다 문이 뻑뻑하고 무거웠다. 시몬은 간신히 사람 한 명 통과할 정도만 벌려놓은 뒤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카쟌도 슬라이딩하며 그 틈으로 들어왔다. “하나, 둘!” 두 사람이 동시에 좌우에서 문을 밀었다. 경비병들이 들어오려 했으나 문의 틈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그대로 닫혔다. 쾅! 쾅쾅! 쾅쾅! 주먹이 문을 거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몬과 카쟌은 등으로 문을 막은 채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 잠시 후. ‘?’ 언제 그랬냐는 듯, 문밖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감을 잡은 시몬이 슬쩍 다시 문을 열어보였다. 경비병 네 명의 등이 보였다. 창을 세우고 문을 막아선 아까와 같은 자세 그대로였다. “세월에 잠식됐으니, 지키고 있는 문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나 보네요.” 저들은 그저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경비병이라면 침입자들을 추격하거나 통행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해야 했지만, 세월의 잠식 상태가 심각한지 그저 앞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문을 떡하니 열어놔도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 카쟌은 팔짱을 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카쟌, 왜 그래요?” “우리도, 결사도, 천년향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불사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소생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 카쟌이 눈 밑의 흉터를 느리게 매만졌다. “하지만 그 실상이, 불사의 힘만 가졌을 뿐이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저렇게 세월에 잠식되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 사실을 결사가 알게 됐다면…….” 시몬이 눈을 크게 떴다. “결사가 선수를 쳤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굳이 10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왕을 납치하거나, 혹은 모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곳을 강행돌파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카쟌이 아공간을 열어 횃불 봉을 꺼내고 아티팩트로 불을 붙였다. 화륵! 활활 불타는 횃불을 들고 걸어간 그가 새까맣게 어두운 벽면의 어딘가에 다시 불을 붙이자. 화륵! 화륵! 화륵! 화륵! 벽면을 따라 불이 차례차례 점등되며 어둠이 걷혔다. “!!” 그리고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으으……. 커흡……! 이미 이곳에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듯, 불이 밝혀진 주변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곳곳에 부러진 창대와 잘려 나간 검이 널브러져 있었고, 천년향의 경비병들은 창에 관통당해 벽에 박혀 있거나, 사슬과 족쇄 같은 것에 묶여 있었다. 불사의 존재들이니 수복은 하게 내버려두되, 해체되어 소생하진 못하도록 저렇게 막아둔 것 같았다. “역시.” 카쟌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보다 결사가 이곳에 먼저 들어왔다.” 그때 창에 관통된 채 ‘수복’을 반복하던 경비병 두 명이 결국 축 늘어졌다. 이내 그들의 몸이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지고. 샤아아아아아- 중앙의 지면에 노란색 빛이 일렁이며 물결쳤다. 잠시 후 두 경비병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소생했다. 그들은 시몬과 카쟌을 보고는 다시 무기를 집어들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시몬이 쓴웃음을 흘렸다. ‘소생하는 장소가 여기였어?’ “온다 시몬!” 카쟌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시몬은 아공간을 열었다. “이제 적당히 상대해 줄 수는 없겠네요.” 달칵! 달칵! 처억! 순식간에 에이션트 언데드, 피어의 본 아머로 무장한 시몬이 마지막으로 날아온 파멸의 대검을 붙잡고 앞세웠다. [지금부터는 최고속도로 돌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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