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13화 세르네가 납치한 태수는 ‘벽운지’라는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시몬은 뒤에서 지켜보았는데, 악당 같은 복장을 입은 세르네가 채찍과 당근을 교대로 활용하며 태수의 혼을 쏙 빼놓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였다. ‘……진짜 깃털 없이도 정신지배를 할 수 있네.’ 시몬은 긴장한 얼굴로 구석에서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내 세르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완수하려는 것뿐이니까요.” 태수가 두려움에 빠진 얼굴로 동공을 흔들었다. “모, 목적이라니……!” “우리는 외부 세계에서 왔어요. 우리의 적이 이곳에 있고, 그들을 막기 위해 왕도까지 왔죠. 놈들은 변장해서 이곳의 왕을 알현하려 할 거거든요.” 간단히 배경을 밝힌 세르네는 벽운지 태수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도적들에게 제물을 잃어버린 채 이대로 왕의 눈 밖에 날지. 아니면 우리가 준비해 온 제물을 들고 왕궁으로 가서 왕을 알현할지. “제, 제물이 있다고?” 공포에 질려 있던 태수의 눈에 일말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지금까지 차림새나 행동거지로만 보면 사악한 자들이고, 자신을 협박해 잔인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왕에게 바칠 제물을 제공하겠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 함께 가서 우리의 적을 견제하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제물을 이용해 무사히 이 위기를 벗어나고, 우리는 우리대로 목표를 이루고. 서로에게 이득이죠.” “……전하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나는 녹봉으로 먹고사는 자요! 수상한 자의 말은 결코 따를 수 없소!” “우리의 적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뭐, 거절한다면…….” 세르네의 미소가 일순 섬뜩해졌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그녀가 시몬과 함께 밖으로 걸어갔고, 섬뜩한 외형의 깃털병사들이 서서히 태수에게 다가왔다. 태수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일단 전하께 바칠 그 제물이 뭔지만 보고 결정하겠소!” 세르네가 무시하고 문을 닫으려 하자 묶여 있는 태수가 꽥 소리를 냈다. “나는 왕실의 예법에 능하오!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소! 잠입에 일말의 빈틈도 없어야 할 것 아니오! 내가 그대들을 도와줄 수 있소! 아, 아니, 도와주게 해주시오!” 시몬은 이 태수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함을 느끼긴 했지만 세르네의 수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제물을 바치면서 같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었다면, 이 정도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왕궁에 진입할 준비가 끝났다. * * * 천년향 왕궁 앞. 저벅 저벅 저벅. 태수의 수행원으로 분장한 시몬은 보자기에 싸인 제물을 두 손에 들고 걷고 있었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수행원으로 분장을 마친 세르네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들보다 앞서 걷고 있던 벽운지 태수가 진땀을 줄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조, 조심하시오. 이 앞에서부터는 금군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고맙소. 이건 진심이오.” 태수가 시몬이 든 제물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원래라면 빈손이라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 말이오. 당신들이 가져온 진귀한 보물을 본 순간, 나는 희망이 샘솟았소! 아마 이번 천도제에서 최고의 제물을 바치는 지역은 바로 우리 벽운지가 될 것이오!” “그럼요.” 어제 그 위협하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세르네는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서로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해요.” 그렇게 세 사람은 천년향의 왕이 머무는 왕도 궁궐 앞에 도착했다. 금군들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 저 사람들.’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붉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휘날리며 사자탈을 쓴 남자들. 예전에 류운과 함께 본 적이 있었는데, 이 금군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때 벽운지 태수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나 벽운지 태수 자현이오!” 스릉! 두 금군이 무기를 거두고 길을 열었다. 태수는 엣헴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수행원 분장을 한 시몬과 세르네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그 순간, 탈 너머로 느껴지는 금군들의 시선이 시몬의 얼굴에 닿았다, 시몬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입구를 지나 궁궐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몬은 천천히 눈을 돌리며 그 경관을 살폈다. 이내 정원을 지나 도착한 곳은 왕궁 회의가 열리는 화려한 건물 앞이었다. 이미 도착해 있던 여러 태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벽운지 태수에게도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벽운지 태수 아니오! 잘 지내셨소?” “허허! 운화도 태수! 나야 아주 잘 지냈소!” 상대 태수는 시몬이 든 제물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물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소. 벽운지는 주민들이 세월에 다 잠식되어 이제 제대로 농사지을 사람도 없다고 들었소만.” “태수께서 다스리는 운화도보다 낫지요! 처음부터 사람이 없는 섬동네보다야 형편이 좋지 않겠소.” 다짜고짜 신경전이 벌어지는 모습. 지역감정까지 심상치 않았다. “도적 떼에게 제물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왕도의 시장에 떠돌던데.” “허허허!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있구려! 누가 들으면 그 도적 떼를 사주했다고 알겠소!” “그럴 리가 있겠소!” 하하하! 허허허! 얼굴은 웃고 있지만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는 분위기. 시몬은 정치 같은 건 어느 세계나 비슷하구나 생각하며 옆에 있는 세르네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결사의 일원으로 의심되는 사람 있었어?” “아직 없는 것 같네요.” “음.” 혹시나 키젠 측 정보가 틀린 건가? 아니면 결사 측이 천도제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왕에게 접근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시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야 너머. 서서히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여러 태수들이 보인다. 그중에서 적색 장삼을 입은 남자. 복장은 다른 태수와는 다를 게 없으나, 머리가 조금 이상했다. ‘도마뱀?’ 머리가 도마뱀이었다. 아종족도 아니고, 저런 파충류 인간은 이곳 천년향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전하께 아뢰어보겠소. -훌륭하오.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바로 그때. 스윽. 소름 끼치는 세로 동공이 움직여 시몬을 응시했다. 시몬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듯,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태수님.” 시몬은 시선을 고정한 채 벽운지 태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기, 저 중간에 있는 태수님이 누군지 아세요?” 벽운지 태수가 고개를 들어 시몬이 말한 태수를 보았다. “아, 저 훤칠한 젊은이? 흑사곡 태수로군! 나도 공식 석상에서 보는 건 처음이오. 50년 전에 흑사도의 새로운 태수가 됐다지 아마.” “……50년 전이면 천년향에는 아주 최근이겠네요.” “바로 그렇소. 잘생겼다 잘생겼다 소문이 자자하던데, 과연 외모가 출중하군! 허허!” 천년향은 도마뱀이 미의 기준인가? 그저 사람 대가리 사이에 도마뱀 대가리가 떡하니 껴 있으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시몬이 목소리를 낮추고 세르네에게 물었다. “저 사람 보이지? 세르네.” “네, 흑발에 코도 오똑하고 잘생겼네요.” 세르네가 그렇게 답하며 시몬을 보았다. “그래도 난 시몬밖에 안 보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자신의 눈에만 도마뱀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시몬은 피로 때문에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도마뱀이었다. 다만,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도마뱀 얼굴이 지직거리며 아주 잠깐 사람 얼굴의 형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왜 남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게 내 눈에는 보이는 거지?’ 여러 이유가 떠올랐으나 가장 유력하게 확 떠오르는 이유. ‘임페라투스 콤펠로를 사용한 영향이 남아 있는 건가?’ 시몬이 생각에 빠져 있는 그때, 바로 그 도마뱀 태수가 저벅 저벅 시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몬이 긴장하며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이내 시몬의 앞에 있던 벽운지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 흑사곡 태수.” “처음 뵙겠습니다 벽운지 태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이 태수님의 덕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저희 지역까지 자자합니다.” “하하하하! 참 말씀도 잘하시오!” 두 사람이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도마뱀 인간이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몬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르네가 옷깃을 잡아당긴 뒤에야 시몬도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토록 고명하신 벽운지 태수께서-” 도마뱀 인간이 시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에 휘말리신 것 같습니다.” “!” 시몬과 세르네, 그리고 벽운지 태수는 동시에 속으로 움찔했다. 벽운지 태수가 애써 웃어 보였다. “무, 무무무, 무슨 말씀이신지……?” ‘연기 못해!’ 시몬이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도마뱀 인간이 관복을 휘날리며 옆으로 걸어갔다. “부디 개인적인 실수로, 전하께 해가 가는 일은 하지 마시길.” 그 한마디와 함께 좌중에 내려앉은 긴장감이 사라졌다. 벽운지 태수는 손으로 땀을 훔치고 있었고, 고개를 든 세르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죠? 초면에 싸가지 없게.” “그게…….” 시몬은 세르네와 태수에게 자신이 본 것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란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도마뱀이요?” “그럼 흑사곡 태수가 두 분이 말한 그 ‘사악한 외부인’이란 말이오?”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시몬이 턱을 짚었다. “일단은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건 사실이네요.” * * * 잠시 후 모든 태수들이 궁궐 내부로 들어왔다. 넓고 세로로 긴 제단이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각 지역의 위치에 따라 태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벽운지 태수가 앉은 곳은 거의 가장 뒤쪽이었고, 수행원인 시몬과 세르네도 그의 등 뒤에 서서 제물을 든 채 대기했다. ‘결사가 여기에 있다.’ 현재 상황을 다시 한번 상기한 시몬이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데.’ 자꾸만 저 도마뱀 인간이 눈에 밟혔다. 저걸 어떻게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도마뱀이 허허 웃고, 도마뱀이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고, 도마뱀이 다과를 씹어 먹는다. 수상해서 자꾸만 눈이 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결사는 보석일족 같은 아종족들도 많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도마뱀 인간의 살벌한 시선이 시몬에게로 향했고, 시몬은 다른 쪽을 본 척 시선을 돌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그때. “주천 전하께서 입궐하십니다.” 그 말에 모든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도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다. ‘천년향의 왕, 과연 어떤 사람일까.’ 처음으로 신과 계약해 불로불사를 얻어내고, 이후 천도제를 주관한 인물. 자신뿐만 아니라 천년향의 만백성과 미천한 마물에게까지 그 힘을 공평하게 적용한 자. 잠시 후 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기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용상에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앳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고, 시몬도 비로소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리다.’ 드높은 용상에 올라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는 인물은 놀랄 만큼 어려 보였다. 겉보기에는 10세 남짓의 외모였고, 햇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금발이 인상적이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는 아름다웠고 머리에 쓴 거대한 왕관은 자신의 몸만큼이나 컸다. “100여 년 만에 보는구려. 과인의 부름에 응해주어서 고맙소.”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천도제는 큰 의미가 있소. 불사의 힘을 얻은 지 벌써 1,000년이 되어가는 중요한 시기요. 모두가 함께 하늘의 은혜를 받들길 바라오.” “합천하옵니다 전하!” 모두가 힘차게 외쳤다. 이내 왕의 뜻에 따라 모든 태수들이 자리에 앉았고, 이런저런 허례허식이 오갔다. 그러다 가장 오른쪽에 앉은 태수부터 하나둘 왕에게 바칠 선물을 가져다 제단에 바쳤다. “전하의 후광처럼 빛나는 대형 황금소 동상입니다.” “5천 년, 1만 년까지 영원하리란 뜻을 담은 보옥을…….” 신하들이 제물을 바치고, 왕이 그 수고를 치하하는 차례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도마뱀 인간의 차례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가 준비한 건 황금을 녹여 만든 거대한 종이었는데, 시몬이 우려한 것처럼 제물을 바치면서 왕에게 뭔가 요구를 하진 않았다. 당장 결사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이제 제 차례로군요. 허허!” 마지막 차례인 벽운지 태수가 으스대며 수염을 쓸었다. 분장을 하고 있던 시몬이 앞으로 나와 준비한 제물을 중앙의 제단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두근!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두근 두근! 살기가 느껴진다. 살의가 피부를 타고 찌른다. 두근 두근 두근! 시몬은 이 순간 확신했다. 지금 이 자리에. ‘……구원자가, 나를 보고 있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