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12화 천년향 왕도의 첫인상은 ‘위압감’이었다. 강 위로 건설된 웅장한 건축물. 대체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 아래의 거대한 문을 통과해 왕도의 수로로 들어서니, 수로의 좌우에 쫙 깔린 도로로 수많은 인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와.’ 천년향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것도 놀라웠지만, 시몬은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경관에 감탄했다. 다른 마을처럼 흙바닥이 아니라 균등한 색깔로 깔끔하게 포장된 백색 바닥에, 그 위로 단아한 건축양식의 가옥들이 솟아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우리는 이쪽에 정박하겠소!” 진해가 노를 저어서 여러 정박지 중 한 곳에 배를 가져다 붙였다. 정박지 직원이 환한 미소로 뛰쳐나왔고, 진해는 동전 몇 개를 그에게 건넸다. 직원은 미소 지으며 화물을 나르는 걸 도와주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시몬이 배 위의 커다란 나무상자를 들어서 양어깨에 짊어졌다. 정박지 직원이 시몬의 차림을 훑어보더니 허허 웃었다. “새신랑께서 아주 힘이 장사시구만 그려!” “……하하.” 쿠웅! 쿵! 시몬의 활약으로 배에 실린 화물들이 정박지에 빠르게 옮겨지는 동안, 세르네는 여전히 배 위에서 다리를 곱게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세르네, 안 내려?” 시몬이 묻자, 세르네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아하.’ 오랜만에 세르네와의 여행이라 그녀의 성격을 깜빡했다. 시몬은 배 위로 다시 올라가 정중히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제야 세르네는 못 이기는 척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일어났다. “가장 예쁜 짐을 옮기는 걸 잊지 마세요?” “아, 알았어.”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밖으로 데려오니 진해와 정박지 직원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않소?” “그러게 말이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구려! 나도 옛날엔 첫 부인과 사이가 참 좋았는데.”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물었다. “옛날이면…… 언제요?” “한 800년 전쯤인가. 이젠 첫 부인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 역시 천년향의 ‘옛날’ 스케일은 대단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시몬 일행은 왕도의 거리로 나왔다. “자, 왕도에 무사히 데려다드렸소.” 진해가 손을 모아 포권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나도 행상으로서 할 일이 많아 동행은 여기까지겠군. 부디 류운을 꼭 데려오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시몬도 같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어요, 아저씨.” 세르네가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진해가 허허 웃으며 덕담을 건넨 뒤, 짐을 운반하는 당나귀 상인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시 둘만 남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구름과 안개에 가려진 거대한 궁궐의 형태가 보이고 있었다. “좋아요, 시작해 보죠.” 세르네가 맞장구치며 시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시몬이 그대로 ‘아’ 하고 끌려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세르네가 눈을 찡긋했다. “임무 수행하러요.” * * * 그렇게 세르네가 말하는 임무 수행이 시작됐다. 우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전당포부터 들어간 그녀는, 가지고 있던 보석류를 팔아서 자금을 확보했다. 반짝이는 광물은 어느 세계든 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후에는 시장 거리 곳곳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저거 먹어볼래요?” 그녀는 둥근 떡꼬치를 하나 사서 시몬과 함께 한 쪽씩 나누어 먹었다. 시몬이 민망해했지만,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는 부부가 어딨냐는 핀잔에 머쓱해하며 먹는 수밖에 없었다. 세르네는 근처 가게에서 난해한 디자인의 옷을 사기도 하고, 기념품을 만지작거리기도 하며 쇼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다양한 옷들, 각종 약초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 널린 시장의 풍경에 시몬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물건의 시세를 가늠할 수가 없네.’ 시몬은 처음 먹은 떡꼬치를 화폐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평범한 목각 인형이 떡꼬치 20개 정도의 가격이었고, 심지어는 종이에 이리저리 낙서가 된 것은 떡꼬치 500개 정도의 가격이었다. 시몬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종이는 왜 이렇게 비싼 거예요?” “아, 이것 말이오? 마용 선생이 직접 쓴 글귀요! 옷깃에 넣어두고 다니면 금전운이 가득해지지!” ‘일종의 축복 같은 거구나.’ 마침 한 손님이 여기서 구매한 종이를 찢자, 마나의 힘이 그에게 들어가는 게 보였다. 대륙에서 마법진과 룬어를 쓰는 것처럼, 이 세계는 종이와 글로 마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기술이 발달한 듯했다. “여보, 이거 봐요.” 세르네의 부름에 시몬이 뒤를 돌아보았다. 긴 명주실 휘장 같은 것을 휘감은 그녀가 몸을 빙그르르 회전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시몬이 쓰게 웃었다. 세르네는 이게 마음에 든다며 구매까지 한 뒤 시몬의 손에 들려주었다. 점점 시몬의 양손이 짐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흥을 깨서 미안하지만, 세르네.” “네에.”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야. 알잖아.” 차악. 그녀가 방금 구매한 부채를 멋들어지게 펼치며 입을 가렸다. 이곳의 부채는 단순한 귀부인용 장식이 아니라, 천년향 특유의 이국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노는 거 아닌데요?” ‘누가 봐도 그러고 있는데.’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고는 시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끌려가던 시몬의 시야에 문득 하늘을 날아다니는 깃털들이 보였다. ‘설마.’ 잠시 후 시장 거리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넓은 공터에 도착했고, 세르네는 낮은 담벼락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이내 그녀가 두 손을 펼치자 시장 곳곳에서 깃털들이 날아와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글쎄, 그 소식 들었소? -천도제에 쓸 음식 말이오! 조정에서 혹시……! 깃털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세르네가 시장에 온 이유는 정보 수집 때문인 것 같았다. 조용히 깃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 왕도의 화제는 하나로 정리할 수 있어요.”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천도제.” 또다시 그 천도제다. 지금 이렇게 왕도로 향해온 물동량이 많은 것도 천도제의 영향이었으며, 무엇보다 류운의 이야기에서도 언급됐었다. -그때 천년향의 백성들은 ‘천도제’를 거행하던 그날 그 시점, 그대로의 모습으로 영원을 얻게 되었소! 나는 그때 어렸고, 7세의 몸인 그대로 1,000년을 살아가게 된 거요! “시몬도 알다시피 천도제는 100년에 한 번 천년향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에요. 다만 본식을 거행하기 전에 이런저런 자잘한 의식들도 많은가 봐요.” 세르네가 기억을 더듬어가듯 말했다. “그중 하나가 천년향 전국의 태수들, 대륙으로 치면 영주들이 올라와 왕에게 각 지역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에요. 하지만 폐단이 큰 것 같네요.” “음.” 시몬이 이야기를 듣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다면, 이때는 확실히 왕을 만날 수 있단 거지?” “맞아요.” “아마 결사도 이때 모습을 드러낼 거야.” 결사가 천년향의 왕에게 접촉하려 한다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분명히 이 천도제를 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년향의 왕은 거의 수백 년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외부인이 갑자기 왕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천도제밖에 없다. 시몬이 손을 깍지 꼈다. “결사의 일원들이 태수로 분장하든, 제물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접근하든, 천년향의 왕을 자신들의 뜻대로 속이려 들겠지.” 세르네가 꼬고 앉은 다리를 풀고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까요?” “우리도 각 지역의 태수 중 한 명을 매수해서 함께 들어가자.” 시몬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가장 리스크가 적은 방법은, 우리 숙소가 있는 지역의 태수를 찾아서 설득하는 거야. 그는 우리 네크로맨서들의 합숙훈련을 허락한 유일한 인물이니까.” “그건 좋은 방법이겠지만-” 세르네가 왕도 곳곳에서 날아오는 깃털을 착착 손끝으로 받아 머리카락 안으로 넘기는 과정에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숙소가 있는 지역인 ‘취월봉’의 태수는 왕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고 해요. 20개 지역 중에서 이름이 빠져 있네요. 아마도 왕의 미움을 샀나 봐요.” ‘……혹시 취월봉의 태수는 왕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들을 초대한 건가?’ 그건 일단 너무 과한 추측이니 접어두기로 했다. 시몬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흐으음-” 그때 세르네가 하늘에서 날아온 새로운 깃털을 붙잡더니,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플랜을 세워볼래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깃털을 들고 시몬에게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시몬이 살짝 긴장하며 말했다. “무슨 플랜?” “눈을 감아요.” “누, 눈은 왜…….” 세르네가 생글생글 웃었다. “나 못 믿어요?” 결국 시몬은 불안해하면서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뒤이어 그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백합 향이 물씬 풍겨왔다. 곧 그녀의 몸이 시몬의 등 뒤에 닿았다. “세, 세르네!” “내가 본 걸 지금 바로 보여줄게요.” 사근한 목소리가 녹아들 듯 귓가를 스쳤고, 동시에 시몬은 자신의 머리에 깃털이 꽂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즉시 어둠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갑옷에 흙탕물이 묻은 병사들이 역력히 지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한 중년 남성이 보였다.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냔 말이냐! 그는 입에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전하께 바칠 제물을 빼앗겼다고? 도적들에게? -보통의 도적이 아니었습니다! 태수! -다섯 명에게 백 명이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태수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체면이고 뭐고 바닥에 주저앉아 뒷목을 붙잡으며 드러누웠다. -소, 송구하옵니다. 태수. 모든 병사들을 풀어 제물의 행방을 찾고 있사오니……! -당장 내일 전하를 찾아뵈어야 하거늘! 이제 와서 찾아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아, 우리도 취월봉 사람들처럼 전하의 눈 밖에 나게 생겼구나! 이내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머리에서 깃털이 뽑히는 감각과 함께 시몬은 다시 눈을 떴다. “천도제에 바칠 제물을 빼앗긴 태수, 딱 괜찮은 발견이네. 절박한 상황인 것 같으니까 우리 말을 들어줄 거야.” “바로 그거예요!” 따뜻한 숨결이 목 뒤를 스치듯 지나갔다. 민망함으로 뺨이 달아오른 시몬이 조용히 말했다. “기억을 다 보여줬으면 이제 그만 비켜줄래?” 세르네가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시몬이 이어서 말했다. “왕에게 바칠 제물이라면 아주 진귀한 물건이어야 할 거야. 우리가 가진 물건 중에 적당한 걸로 협상해 보자.” “협상으로는 부족해요.” 세르네는 재미가 들렸는지 부채를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제물을 우리가 마련하더라도 기껏해야 수행원으로 같이 들어가는 정도겠죠. 우리는 결사에 대해 천년향의 왕에게 경고해야 하니 조금 더 강한 ‘직권’이 필요해요.” “그렇긴 한데…… 어떻게 하지? 네 정신지배도 이 세계에서는 완전하지 않고.” 세르네가 미소 지었다. “협상보다 더 좋은 건 협박이죠. 이번엔 내가 움직여 볼게요.” * * * 그렇게 날이 저물 무렵, 세르네는 좋은 소식이 있다며 시몬을 데리고 이동했다. 왕도의 외곽지역. 왕도라고 해도 다 같은 왕도는 아닌 듯, 외곽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세월에 잠식되어 무기력한 표정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류운의 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시몬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뭘 하려고?” “준비를 이 근처에 해뒀거든요. 일단 태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세르네는 아공간을 열고 시장에서 샀던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시몬이 보기에 전혀 필요 없어 보였던 물건들, 그중에서도 왜 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당히 무섭고 악당 같아 보이는 검은 털옷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갈아입어 봐요.” 세르네는 남자 옷을 시몬에게 건넨 뒤, 자신도 여자 옷을 꺼냈다. 이어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카펫 같은 게 깔리는 환상이 일어났다. 바로 옷을 갈아입는 건지 스르륵 섬유 끌리는 소리가 났고, 바닥에는 그림자가 비쳤다. 시몬이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 의상으로 뭘 할 거야?” “정신지배는 이능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녀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본연의 매력과 간단한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답니다?” “으음.”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하니, 시몬도 시키는 대로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그녀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다. 평범해 보이는 낡은 창고였는데, 세르네가 눈을 찡긋하더니 문을 걷어찼다. 투쾅! 창고 문이 열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으읍! 읍!” 그 안에는 왕에게 바칠 제물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 태수가 밧줄에 묶인 채 꿈틀거리고 있었고, 좌우에는 세르네의 소환수인 깃털병사들이 서 있었다. ‘……나, 납치?’ 세르네는 천년향의 태수를 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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