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60화 “허억! 헉! 진짜 사람 잡겠네!” 딕 헤이워드는 손에 물걸레를 들고 성벽 아래를 박박 닦고 있었다. 양동이에 담긴 걸레가 세 개쯤 빨갛게 물든 후에야 비로소 성벽의 하얀 표면이 드러났다. 딕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투덜댔다. “1군단을 막으러 결연한 마음으로 노바렌에 왔는데, 설마 여기서도 청소를 하게 되다니!” 그 옆에는 시몬이 빨간 바닥을 물걸레질하고 있었고, 로레인은 조각칼을 꺼내 공원 벤치에 묻은 붉은 칠을 사각사각 벗겨나가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마법진으로 사용될 만한 피와 붉은 칠을 없애고 있었다. 벽면이나 바닥 청소는 물론, 붉게 칠해진 바리케이드나 물건들을 일일이 치우러 다녀야 했다. 심지어- “……너무해.” 수통에 든 물을 마시던 로레인이 한 주민의 로브에 붉은 칠이 칠해져 있는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사람마저 마법진의 요소로 쓸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러게 말이야. 내가 갈게.” 딕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걸어가 등에 붉은 칠이 칠해진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당당히 말했다. “실례지만 옷 좀 벗어 주시겠습니까!” 뒤돌아본 여성이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경비병 쪽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뚝. 뚝. 로레인이 재빨리 마시던 수통의 음료를 자기 옷에 끼얹었다. 옷차림이 축축해진 그녀가 다가가 미안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덤벙대다가 옷이 젖어서 그런데…… 괜찮으시다면 입고 계신 로브를 얻어 쓸 수 있을까요? 옷값은 물론 지불할게요.” 로레인의 놀라운 순발력이었다. 그제야 주민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지 않았을 거라며 흔쾌히 낡은 로브를 벗어 건네주었다. 로레인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때 시몬이 슬쩍 끼어들어 주민이 벗어 준 옷을 가리켰다. “혹시 이 로브에 붉은 칠이 묻은 건 알고 계셨나요?” 주민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디서 이런 게 묻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더니, 어차피 버릴 옷이니 돈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딕, 오해 살 행동 좀 하지 마.” 그제야 시몬이 옆을 흘겨보며 말했다. 딕이 억울한 표정으로 팔을 늘어뜨렸다. “뒷모습 보고 남자분인 줄 알았지! 그리고 진짜 친절하게 부탁한 건데!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냐?”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주민을 따라가서 은화 하나를 건네주고 온 로레인이 말했다. “계속 움직이자.” 그녀는 방금 받아낸 로브를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붉은 칠이 너무 많아. 어떤 게 마법진의 요소로 쓰일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원인이 될 만한 요소를 줄이는 게 좋겠어.” “……그, 그래.” 그런데 시몬과 딕이 슬쩍 눈을 피한 채 주뼛거리고 있었다. 로레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자신의 젖은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미안.” 그녀가 무안한 웃음을 흘리며 새 로브를 꺼내 몸을 가렸다. 그렇게 다시금 도시 청소가 재개되었다. 딕은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페인트 통을 든 뒤 빠르게 달려갔다. 로레인도 뭔가를 발견했다. 노점상 옆의 고물 뭉치에 붉은 칠이 묻어 있었던 것. 그녀가 노점상 주인에게 다가가 핀 하나를 구매한 뒤, 옆에 놓아둔 고물 뭉치를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고 허락까지 받아냈다. “웃차.” “흡.” 로레인과 시몬은 고물 뭉치를 들어 골목 안쪽으로 옮긴 뒤, 아공간을 열어 전부 집어넣었다. 시몬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 조금만 쉬자. 여기 온 뒤로 제대로 앉지도 못했잖아.” “응. 그게 좋겠네.” 두 사람은 인적 드문 골목길의 벽에 기대어 앉은 채 로브 후드를 살짝 벗고 잠시나마 땀을 식혔다. 시몬은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로레인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로레인.” “?” “확실히 마계랑 천년향에 다녀오고 나서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 그녀가 손을 멈추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냥 내 느낌상.” 가볍게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스트레칭을 한 그녀가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든 것들에 조금 더 감사하기로 했어. 살아 있는 것,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게 주어진 기회들까지. 그리고…….” 그녀가 방금 노점상에서 구매한 핀을 꺼냈다. 한창인 키젠 여학생들이라도 손사래를 칠 만큼, 지나치게 선명한 분홍색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더 용기 내서 해보려고.” “그렇구나.” 그녀는 쓱쓱 머리를 정리하더니 시몬에게 핀을 건넸다. “미안하지만 머리핀 좀 꽂아줄래? 이쪽에.” “내, 내가?” “응, 청소하다 보면 머리가 자꾸 흘러내려서.” 시몬은 살면서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던 여자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렇게?” “응, 맞아.” 땀을 흘려도 그녀의 머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시몬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고 핀을 꽂아주자, 로레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로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정리하며 말했다. “다시 가볼까? 저기도 붉은 칠이 보여.” 그렇게 말하며 살풋 웃는 그녀의 미소는 한결 자유로워 보였다. * * * 한편, 노바렌의 지하 연회장에서는 은밀하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아이들아, 중요한 때가 왔단다. 황제의 이름 아래 볼드윈 왕국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다.] 검은 미망인의 복장을 입은 브리만티아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짓하며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움직이거라.] “어머니.” 그때 한 복면인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준비해둔 마법진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도시에 방해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해자들?] “예, 절묘한 곳들만 끊어서 지우는 걸 보니, 마법적 이해도가 높은 자들입니다. 연합의 네크로맨서들이 노바렌에 잠입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브리만티아가 미소를 지었다. [예상한 바로구나. 우리도 계속해서 마법진을 이어나가도록 해라. 만약 발현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꾸욱.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곳곳의 황금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장 중요한 수는 숨겨두었으니.] * * * 독립 선언 한 시간 전. 노바렌에서는 어떤 성문에서 출발하든, 결국 높다란 건물에 둘러싸인 방대한 도시 대광장에 도달하게 되는 구조였다. 바로 이 대광장이 독립식이 시작되는 곳. 왕국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주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죽겠다아.” 그동안의 고생으로 딕이 축 늘어진 채 말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시몬과 로레인은 물을 나눠 마시며 앞을 응시했다. “세르네 팀도 무사히 도착했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제 체력을 비축하면서 전투를 준비하자.” 시몬이 고개를 돌려 딕을 보았다. “장비 확인 부탁해, 딕.” “내 임무 준비는 늘 오케이지!” 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장비 점검하러 가볼게. 둘 다 조심하고.” “고마워, 딕도 조심해.” 로레인의 인사에, 딕이 허리 숙여 귀족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한 뒤 휘척휘척 떠났다. 시몬은 다시 고개를 들어 광장 전면에 위치한 높은 연단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독립식까지 30분 전. 대광장은 점점 더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시몬이 씁쓸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브리만티아 쪽도 집요하네.” 그렇게 열심히 지우고 다녔는데, 주민들의 옷 곳곳에 붉은 칠이 새롭게 더해져 있었다. 아무런 마법적 규칙성이 없어 보이지만, 저 옷의 칠이 어떤 식으로 마법진에 이어질지 모른다. ‘뭐, 그래도…….’ 원을 그려 만드는 피의 마법진은 티끌만 한 틈이라도 이어지지 않으면 발현하지 않는다.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때 최대한 대처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대광장이 긴장감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5초 전.’ 시몬이 손목시계를 살폈다. 아직까지 마법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3, 2, 1.’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말수를 줄이고 대광장의 연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기 오신다!” “오오! 전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환호로 바뀌었다. 누군가 연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몬의 눈이 커졌다. ‘국왕 전하……!’ 볼드윈의 국왕이 연단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성대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광장 앞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거나 땅에 엎드려 예를 취하기도 했다. ‘분명히 죽었을 텐데.’ 국왕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었고, 손을 들어 관중들에게 흔드는 동작은 뭔가 어설펐다. 왕실 네크로맨서들이 뒤따라와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모여주어서 고맙소!” 그리고 왕이 아닌, 뒤따라온 한 남자가 확성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로레인의 목소리에 적대감이 흘러나왔다. “……삼왕자.” 다름 아닌 삼왕자 헨릭 볼드윈이었다. 그가 연단에 등장해, 룬 리그 합숙 때 보였던 왕실 고유기인 ‘디맨션 링크’를 발현했다. 곳곳에 체스 모양의 기물들이 움직여 주먹을 치켜들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아버지의 기력이 쇠약하시어, 내가 대신 독립식 연설을 하겠소.” 헨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우리 볼드윈이 암흑연합에서 독립한 것을 무한한 영광이라 생각하오!” 그는 볼드윈의 역사와 자긍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네크로맨서로서의 실력은 애매했지만, 기본적으로 왕실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라 그런지 연설 능력만큼은 뛰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암흑연합은-!” 그리고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볼드윈을 착취하고 있소!” -옳소! -그렇지! 곳곳에서 관중들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연합에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우리는 철저히 이용당할 뿐, 연합에 들어와서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소! 다른 삼왕국과 연합은 우리 왕국에 빨대를 꽂고 제 배를 불리기 바빴소!” 관중들이 그의 말에 열광했다. “결사 사태가 시작되자 그 민낯은 더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소! 그들은 드레스덴 왕국을 비롯한 자신들과 가까운 왕국만 철저히 보호할 뿐, 우리 볼드윈은 방치했소! 심지어 우리 측 병력과 인재를 요청해서 다른 나라 영지나 방비했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관중들이 뜨거운 함성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 하나도 없어.” 로레인은 잔뜩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어떻게 왕가의 사람이 저런 거짓을 백성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거지?” “헨릭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닐 테니까.” 그때 품속의 통신 수정구에서 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듣고 있기 역겹네. 지금 시작할까? “아니.”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리고 헨릭의 거짓은 이 순간에 절정에 치달았다. “암흑연합은 선을 넘었소! 우리가 자유를 되찾기 위해 연합에서 독립한다고 선언하니, 그들이 우리를 계속 수탈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한 줄 아시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언데드를 보내 사가루인의 왕궁을 습격했소! 그들은 연회에 귀족들이 모인 때를 노렸소! 많은 귀족들, 하인들, 그리고 나의 형……! 왕태자까지 죽였소!” 헨릭이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절규했다. 이에 곳곳에서 대중들의 탄식과 분노가 흘러나왔다. 핏대가 선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러댔다. “우리는 이러한 폭거에 저항할 것이오! 우리는……!” 바로 이때. 시몬이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지금이야, 딕. 세르네도 시작해.” 판이 뒤집힐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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