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59화 이틀 뒤, 볼드윈 왕국 영지 여덟 곳에서 독립식이 거행된다. 시몬은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그사이 다른 팀원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온 헥토르는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볼드윈에서 1군단 측 인원들을 찾아내 한바탕 싸우고 온 모양이다. 메리다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돌아왔는데,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졸려할수록 컨디션이 좋았으니까. “우후훗, 다들 약골이네요. 이 정도로 퍼지다니.” 반면 세르네는 옷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채 멀쩡히 돌아와 후후 웃고 있었다. 헥토르가 그녀를 노려보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소파에 몸을 묻었고, 세르네가 눈썹을 꿈틀했다. “어머나, 많이 컸네요 헥토르 무어?” “내 입만 아프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려는 순간, 시몬이 손뼉을 치며 2층 방에서 나타났다. “자, 우리끼리 싸울 시간 없어.” 시몬은 모든 팀원이 모인 이때 계획을 설명했다. 목적은 이틀 뒤 독립식에서 벌어질 1군단의 흉악한 계획을 막아내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왕자 리어스를 왕으로 만드는 것. 리어스가 왕이 되면 다시 볼드윈은 암흑연합에 돌아올 수 있게 되고, 1군단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가 가능해진다. “……음.” 물론 리어스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눈빛에서 심지가 느껴졌다. 카쟌은 테이블에 볼드윈 왕국의 지도를 펼치고, 독립식이 열리는 장소 여덟 곳을 표시해 두었다. “이 여덟 곳 모두 막아야 해.” 시몬이 설명했다. “현재 볼드윈은 독립국 취급이니, 암흑연합을 비롯한 다른 왕국에서 정식으로 전력을 파견할 수 없어. 그러니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지원군을 얻으려고 해. 상황은 어때 로레인?” 방금까지 통신수정구로 통화를 하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었다. “결사의 공세가 막 심화된 상황이라서 키젠에서도 인력이 부족한가 봐.” 딕이 뒷머리를 받친 채 입맛을 다셨다. “여윽시 결사야. 그놈들이 허술해진 틈을 놓칠 리가 없지.” “그래도 어떻게든 허가는 따냈어. 키젠 본부 직원 7명이 파견될 거야. 물론 정체를 숨기고, 볼드윈 왕국 출신 멤버들의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괜찮지?” “대단해, 로레인!” 시몬이 힘차게 말했다. 마계에서 돌아온 로레인의 대활약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팀원으로 삼지 못했다면 여러모로 일이 힘들어질 뻔했다. 세르네는 괜히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래 권력이 무섭긴 한가 봐요? 없는 살림에 아주 쥐어짜 내주네요.” 그 말에 로레인이 싱긋 웃었다. “전부 세르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세르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몬과 딕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자, 그럼 키젠에서 오는 본부 선배님들은 각각 한 명씩 독립식이 열리는 영지에 배치할 거고.” 시몬이 지도 밖에 있던 말들을 한 번에 움켜쥔 뒤, 지도 위에 척척 새롭게 세워두었다. “우리는 국왕이 온다는 노바렌에 갈 거야. 아마 그쪽에서는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아.” “바라던 바다.” 헥토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때 지도를 지켜보던 카쟌이 말했다. “시몬, 노바렌에서 조금 떨어진 베드리모 영지도 규모가 크다. 이곳에서도 1군단이 흑마법을 준비할 우려가 있겠군.” “그럼 베드리모에는 메리다가 가서 힘을 보태줘.” 시몬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 중에서 군단을 보유한 데다가, 지형 전체를 변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건 메리다뿐이니까.” “응, 좋아.” 이제 전력 배치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 시몬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할게. 딕, 메모리얼 수정구 복사 상황은 어때?” “완벽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 딕이 엄지와 약지로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말했다. 그는 메모리얼 수정구 여러 개를 작동시켜, 시몬이 복사해 온 원본 수정구의 영상을 다른 수정구에 옮기고 있었다. “볼드윈의 영주들에게는 편지와 함께 증거로 메모리얼 수정구 복사본을 보낼 거야.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왕가로 간 귀족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한 답은 주겠지. 그들이 나서서 영지민들의 이탈을 통제해 줄 거야.” 시몬이 다시 지도의 노바렌을 가리켰다. “하지만 핵심은 노바렌, 이 지역은 태생부터가 반암흑연합 성향이 강한 곳이고, 사람들도 볼드윈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해. 독립식 연설을 듣기 위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겠지. 우리가 가서 계획을 막아내고, 이곳에 숨어 있는 1군단을 제거할 거야.” 이야기를 듣던 헥토르가 팔짱을 꼈다. “우리가 움직일 합법적 권리는 손에 넣었나?” “응, 리어스 왕자님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을 품에 숨기고 볼드윈에 잠입할 거야.” 그 말을 들은 헥토르의 고개가 리어스를 향했다. “왕이 되지 못한다면 꼼짝없이 전원 반역자행인가.” “…….” 헥토르의 시선을 받은 리어스가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팀원들은 초조한 얼굴로 헥토르를 바라보았고, 딕은 헥토르를 향해 두 손을 들어 미친 듯이 X자를 그려 보였다. 왕태자에게는 대뜸 아버지를 죽일 수 있겠냐며 직접적으로 묻던 게 바로 그였으니까. “…….” 다행히 헥토르는 리어스에게만은 뭐라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 밀어붙이진 않는 듯했다. “조오아! 그럼! 세계를 지키러 가보자고! 다 같이 손 한번 모으고 가자!” 메모리얼 수정구 녹화를 마친 딕이 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 헥토르가 오만상을 썼다. “유치하네요.” 세르네도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시몬이 슬쩍 웃으며 손을 모아주자, 세르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잽싸게 시몬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헥토르도 한숨을 푹 쉬며 손을 내밀었고, 다른 팀원들도 다가와 손을 차례대로 겹쳤다. “저하!” 로레인이 미소 띤 얼굴로 권유했다. 텁. 잠시 망설이던 이왕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모두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가 눈을 감고 후우 하고 숨을 토해내더니 한결 선명해진 눈동자로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부러웠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그저 이 일을 외면할 입장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목소리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런데 여러분을 만나고 나서, 왜 여러분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저와는 달리 그냥 못 본 척해도 되는데, 왜 목숨을 걸고 반역자가 되는 리스크까지 짊어지려는 걸까. 앞으로도 저 같은 소인배는 여러분 같은 영웅들을 이해할 수 없겠죠. 그래도…….” 그가 입술을 한 차례 깨물다가 애써 웃음을 흘렸다. “여러분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왕자인 제가 이 일을 피할 수는 없는 거겠죠.” 시몬과 로레인이 웃음 지었다. 딕이 콧등을 쓸었고 헥토르는 콧김을 뿜었다. “해봅시다.” 이왕자가 말했고, 딕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하나 둘 셋 하면 해보자로 가자! 하나 둘 셋!” “해보자!” 모두가 그렇게 외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 * 시몬과 팀원들은 즉시 준비를 마치고 아지트에서 나설 채비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왕자님!” 아지트에 카르델 영지에서 보낸 사람들이 방문했다. 심지어 시몬의 보고를 받고, 카르델의 대영주가 병든 몸을 이끌고 직접 나타난 것이다. “송구합니다, 저하 송구하옵니다!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신하 된 입장에서 전하를 지키지 못하여 대단히 송구합니다.” “겨, 경의 탓이 아니에요.” 대영주는 이왕자와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 시몬에게도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왕자님을 데려와 줘서 무사히 고맙소, 학생회장. 볼드윈 왕국 전체가 큰 빚을 졌소.” “별말씀을요.” 카르델 대영주는 다른 곳에 알리지 않고, 왕가의 핏줄인 이왕자를 다시 볼드윈 측에 돌려준 시몬의 결정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만약 다른 곳에 이왕자를 보냈다면, 수많은 정치적 문제가 발생해 볼드윈 왕국 전체가 여러 파벌로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라고. “건투를 빌겠소.” “왕자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시몬 일행이 아지트를 나섰다. 각자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국경으로 이동한 뒤, 노바렌에서 모이기로 했다. 한 번에 우르르 몰려가면 눈에 띌 테니, 시몬 로레인 딕이 한 팀. 그리고 헥토르 세르네 카쟌이 한 팀으로 나뉘어 노바렌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국경에서 유령마를 타고 꼬박 밤을 새며 달리니. “저기 보인다!” 딕이 소리쳤다. “거대 영지 노바렌이야!” 우뚝우뚝 시원하게 솟은 성문과 성벽이 보인다. 노바렌 앞 벌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전부 독립식과 볼드윈 국왕을 직접 보려는 인파였다. 워낙 출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성에는 특별한 절차 없이 신분증만 보이면 입장이 가능했다. 시몬 일행도 위조 신분증으로 간단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웅성 웅성 웅성! 성문을 통과하자, 거리는 온통 수많은 인파로 바글거렸다. 앉아서 싸 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 지인을 찾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도시 공용 변소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음.” 시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도시 곳곳에 붉은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런 깃발, 평소 볼드윈 왕국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헤이, 시몬! 여기 좀 봐!” 딕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시몬과 로레인이 그리로 가보니, 성벽 안쪽을 따라 붉게 칠한 긴 선이 눈에 띄었다. 그 붉은 칠은 성벽 끝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거 그거 맞지? 1군단 측이 마법진을 만들 때 쓰는 피.” 시몬은 자세를 낮춰 살펴보더니, 혈류학 키트를 사용해 확인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확실해.” “자, 자, 지금부터 내가 1군단의 계획을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딕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굴며 손가락을 하나 뻗더니, 붉은 선을 지우개처럼 중간에서 쓱쓱 지워 끊어냈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렸다. “끝! 내가 수백만 국민들을 구했다!” 시몬이 로레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딕이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보 교수님도 말했잖아! 피로 만드는 마법진은 결국 극도로 클래식한 구성이라, 피가 직접 이어지지 않으면 어떤 강력한 마법도 효력이 없다고! 이걸로 내가 1군단을 막은 거지!” 로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1군단도 바보가 아니니까, 독립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 정도는 다시 칠하지 않을까?” “그러면 또 손으로 지우면 그만이지! 이어지지만 않으면 돼!” “딕.” 시몬은 딕을 부른 뒤 팔을 뻗어 위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높은 언덕과 언덕을 오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아래에도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미친.” 그 붉은 칠은 다리를 지나 언덕 너머로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여기도 있어.” 로레인이 옆의 나무 바리케이드를 가리켰다. 바리케이드 위에도 붉은 칠이 이어져 있었다. 딕이 골치 아픈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플랜 B는 물론, 거의 뭐 Y, X, Z까지 준비되어 있는 건가? 이러면 어떤 마법진을 막아야 할지 모르겠네.” “최선을 다해서 눈에 보이는 건 다 막아봐야지.” 그렇게 말한 시몬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로레인이 시몬을 보았다. “시몬, 왜 그래?” “아.” 시몬이 천천히 로브 주머니에서 손을 떼서 손바닥을 펼쳤다. 축 늘어져 있던 황금실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비밀 집회에서 만났던 미망인, 브리만티아도 이곳 노바렌에 와 있었다. 아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는 라큄의 사념이 웅웅 울려 퍼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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