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458화 시몬과 로레인은 이왕자를 데리고 유령마에 올라타 국경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국경으로 가는 도중 어마어마한 피난 행렬을 보게 되었다. 레스힐 같은 작은 시골 마을이야 중앙에 무슨 일이 있건 농사짓느라 바쁘지만, 큰 도시일수록 인구 이탈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볼드윈 국경을 빠져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키젠 하수인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랭거스틴의 아지트에 돌아왔다. 아지트에는 딕뿐이었는데 정보 정리에 정신이 없어 보였고, 다른 멤버들은 모두 볼드윈에서 활동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하.” 달칵.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포니테일로 만든 로레인이 이왕자 앞에 직접 끓인 차를 내려놓았다. “곧 볼드윈 왕국 카르델의 대영주님이 사람을 보내서 왕자님을 모셔가기로 했어요. 그곳으로 가면 안전할 거예요.” “…….” 이왕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의자 위에 다리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었다. “자, 시몬도.” “고마워, 로레인.” 시몬은 모처럼 로레인이 내려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왕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이왕자, 리어스 볼드윈. 일명 ‘왜소한 리어스’. 신체적으로 축복받은 왕태자나 왕가의 능력을 다루는 삼왕자 헨릭과는 다르게, 이왕자 리어스는 ‘왜소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신장이 작았고, 팔다리도 가늘었다. 눈도 둥글, 얼굴도 동글동글, 목소리는 가녀리고 얼굴도 동안이다. 무예, 학문, 흑마법 모두 기준 미달이며, 그나마 재능이 있는 분야는 예술 쪽이었다. 그런 심약한 이왕자가 이제 왕위를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 아마도 카르델 대영주는 리어스 이왕자를 데려가면 바로 그를 왕으로 세울 것이다. 그나마 헨릭 외에 유일한 왕가의 핏줄이니까. “……군단장님.” 그때 침묵을 지키던 이왕자가 말을 걸었다. 시몬이 얼른 부드럽게 표정을 고치며 답했다. “네, 저하. 그리고 그냥 시몬이라고 불러주세요.” “사가루인에서 탈출할 때, 제게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숙였다. “……도무지 자신이 없어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시몬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격려? 응원? 아니면 낙관적인 전망? 하지만 그런 입 발린 말을 해준다고 해도 용기를 얻을 타입은 아니었다. 고민하던 시몬은 순리대로 답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왕실의 핏줄은 헨릭과 왕자님뿐입니다. 이왕자인 리어스 왕자님이 왕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왕자 리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헨릭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어차피 우리 왕국에는 나이대로 왕이 되어야 한다는 규칙도 없고, 나와 헨릭 중에서는 하운드키즈였던 헨릭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요! 강하고, 왕가 고유기도 가지고 있구요! 하지만 나 같은 건……!” 자책감을 이기지 못한 리어스가 쿵 하고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그 바람에 책상에 올려뒀던 작은 노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시몬이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그걸 줍는 동안에, 리어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고 있었다. “…….” 시몬은 떨어지느라 펼쳐진 노트를 보았다. 유령마에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괴로움을 견디며 계속해서 노트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노트에 그린 건 죽은 그의 형인 왕태자의 모습이었다. 왕태자의 초상화. 왕태자의 웃는 얼굴. 광장에서 손을 번쩍 들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 왕위를 승계받고, 국왕이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 페이지를 넘길수록 전부 왕태자의 그림뿐이었다. ‘여기 오는 동안 계속…….’ 섬세하게 얼굴 주름 하나하나 표현했다. 눈물인 듯 곳곳에 잉크가 번진 자국도 있었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노트를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오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려는 그때. 툭. 어느새 다가온 로레인이 시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혼자 있게 내버려두자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이 있는 주방을 지나 아지트의 탁 트인 공용 공간 쪽으로 나왔다. “우와아,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딕은 아지트 벽면에 도둑길드에서부터 들여온 여러 단서와 정보들을 착착 붙여 나가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리를 박박 긁기도 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유독 초췌해진 딕의 모습을 보며, 로레인이 웃으며 다가갔다. “딕, 이거 마시고 해.” “오우! 미래의 암흑연합 총수가 손수 끓여준 차라니! 손자 세대까지 자랑하고 다녀야겠는데?” 딕이 호들갑을 부리며 차를 급히 마시다, 뜨거워서 난리를 치며 혀를 내밀었다. 로레인이 자그맣게 웃었다. “딕은 재밌네.” 매일같이 다니던 메이린과 카미바레즈에겐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반응이었다. 딕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존감이 되살아난다! 크흑, 나 원래 재미있는 사람이었구나!” 시몬이 빙그레 웃으며 딕을 보았다 “그보다 추가로 들어온 정보는 없어?” “전에도 카쟌이 말했다시피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야. 그중에 신뢰성 있는 정보를 골라내는 게 어렵지.” 딕이 로레인이 끓여 준 찻잔을 가지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런데 너희가 겪은 사가루인 사태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소식도 없어. 당연하겠지만 왕국 측에서도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고……. 아마 시몬, 네가 촬영한 메모리얼 수정구 영상이 유일한 증거가 될 거야.” 잠시 머리를 묶은 리본을 매만진 로레인이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몬, 나도 로크섬에 연락해서 알아봤는데 정치 쪽도 혼란스럽나 봐. 암흑연합의 시작이 4개 왕국의 협의체인 만큼, 모든 시스템이 4왕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의사 결정에 혼선이 있는 모양이야. 급하게 의사 체계를 3왕국 중심으로 개정해야 하는데, 중심을 잡아주던 볼드윈이 빠지면 손해를 보는 국가와 기관 측에서 반대표를 행사하고 있나 봐.” 흔히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 결론만 쉽게 말하자면 암흑연합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연합 제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1군단, 지금까지의 적과는 달라.’ 결사라는 외부 차원에서의 공격은,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든 공통된 적개심을 가지고 대항할 수 있다. 암흑연합과 신성연방의 사이가 전보다 좋아지고, 공동전선을 펼치거나 룬 리그를 함께 연 것도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번 1군단은, 볼드윈 왕국의 독립 문제를 일으켜 내부에서 암흑연합 시스템의 가장 취약한 점을 찌르고 있었다. 확실히 1군단 측은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시몬, 네가 빨리 움직여 줘서 다행이었지 진짜.”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가루인에 있었던 일들을 메모리얼 수정구로 녹화했고, 이왕자님까지 살려서 이리로 데려왔잖아. 네가 없었으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두 손 놓고 당해야 했을 거야. 어쨌든, 이제 우리한테도 반격의 카드는 있는 셈이지.” “……음.” 그건 맞았다. 움직일 강력한 카드와 명분은 있다.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했다. 벌컥! 그때 아지트 문이 크게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쟌!” 볼드윈 왕국에 직접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카쟌이 아지트에 복귀했다. 그 또한 며칠 사이 야위어진 모습이었다. 그간의 고생이 느껴졌다. “볼드윈에서의 새로운 소식이다.” 카쟌이 저벅저벅 걸어가며 테이블에 뭔가를 툭 하고 떨어뜨렸다. 하나는 벽보, 다른 하나는 메모리얼 수정구였다. 시몬과 딕은 우선 벽보부터 확인했다. 위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아래에는 왕가의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다름 아닌 왕이 직접 각 지역에 내린 칙령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독립식 선언> ‘!’ 왕의 칙령답게 내용이 쓸데없이 장황했지만, 요약하자면 당장 이틀 뒤에 독립식을 열고, 국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만백성 앞에서 왕국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왕국 역사상 긴급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사가루인을 대신하여 임시 수도 역할을 해왔던 ‘노바렌’이라는 곳에서 왕이 직접 나와 독립을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그 밖에 노바렌으로 오지 못하는 백성들은 가까운 도시 7곳을 독립식 장소로 정해두었다. 친암흑연합 성향이 강한 카르델 대영지는 제외되어 있었다. “……와, 진짜 막장이네! 아무 협의도 없이 일단 독립 선언을 하고 보겠다고?” 딕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보고 있던 로레인도 표정을 굳혔다. “왕가를 해친 사람들이 뻔뻔하네. 거기에 칙서에 왕가의 인장을 쓰고 왕을 사칭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시몬은 칙서를 확인한 뒤, 바로 메모리얼 수정구를 작동시켜 보았다. 왕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볼드윈의 모든 백성은 들으라. 나는 볼드윈의 국왕 사르도르 볼드윈이다. 우리는 암흑연합에서 독립하여…….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칙령을 왕이 직접 읽어주는 음성이 담겨 있었다. 백성들에겐 칙서를, 귀족 가문에게는 직접 왕의 음성을 담은 메모리얼 수정구를 보낸 것 같았다. “…….”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주방 식탁에 앉아 있던 이왕자 리어스가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그는 녹음된 국왕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떨다가 얼굴을 가렸다. “아바마마…….” “…….” 국왕은 이미 죽었다. 이 목소리는 가짜거나, 1군단 특유의 흑마법을 통해 모종의 방법으로 녹음시킨 것이다. 리어스는 충격에 시름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독립식이 이틀 뒤라는 게 제일 충격이야. 국민들이 제때 모이기도 힘들겠구만.” 딕이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충격에 빠져 웅성거리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할게요.” 시몬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이번 독립식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그들을 흑마법으로 착취하기 위한 1군단의 흉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프로스트 필드에서 발견했고, 아보 교수님이 시연한 그 현상이죠.” 리어스 이왕자를 제외한 모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왕자 헨릭은 1군단과 손을 잡은 게 확실합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을 대가로, 왕위를 손에 넣고 권력을 휘두르겠죠. 반드시 그들의 계획을 막아야 합니다.” 시몬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왕자님. 가족을 잃고 가장 고통스러우신 때에,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왕위에 올라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많은 국민들이 죽습니다.” “……아.” “저희가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지만, 암흑연합의 해체에 반대하는 키젠 측 인물이 증거를 밝혀봐야 공허한 외침일 뿐이겠죠. 음모론 취급이나 받을 겁니다. 만백성의 인정을 받는, 공신력 있는 리어스 왕자님이 왕위에 올라서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허억! 헉! 이왕자 리어스가 가슴에 손을 얹고 몸을 굽혔다. 고통스럽게 몸을 여러 차례 떨었고, 팀원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왕위를……. 사람들을…….” 일명 왜소한 리어스. 저렇게 심약하고, 연약하며, 예술을 좋아할 뿐인 소년이 이제는 유일한 볼드윈의 희망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떨던 그가 마침내. 꾸욱. 옷깃을 강하게 쥐며,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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