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90화 “……으음.” 다음 날 아침, 소환학과 강의실에 도착한 시몬은 퀭한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활기찬 모습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시몬의 상태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결국 알라제랑 리치 연구하다가 밤을 새웠네.’ 수업 첫날부터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시몬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간질 간질- 뺨에 뭔가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으음.” 시몬이 저항하듯 팔 밑으로 얼굴을 숨겼지만 이번엔 목덜미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문득 오기도 생겼기에, 눈을 꾹 감고 버텼다. “어머나, 잠에 푹 빠졌네요.” 귀에 익으면서도 녹은 설탕처럼 끈적이는 목소리가 속닥거렸다. “이대로 지배해 버릴까?” 갑자기 소름이 쭈욱 끼친 시몬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상아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여우 같은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세르네.” 역시나 세르네 아인다르크였다. 시몬이 뚱한 표정으로 그녀가 든 깃털을 바라보자, 세르네는 그것을 등 뒤로 숨기며 우아하게 웃었다. “오호호! 피곤해 보여서 장난 좀 쳐봤어요. 수업 첫날부터 왜 그렇게 퍼져 있어요?” “……군단 쪽 일을 하느라 밤을 새웠어. 너무 열중했나 봐.” 원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몬이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졸음에서 빠져나오는 사이, 세르네는 언제나 그랬듯 시몬의 뒷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끌고, 엉덩이를 붙이고,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시몬은 시선을 앞으로 둔 채 스트레칭을 계속하며 입을 열었다.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어? 메이린 말로는 상아탑엔 쭉 없었다던데.” “신성연방에 갔어요.” 시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물론 그녀의 대답도 놀라웠지만,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뒷목에 닿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백합 향이 훅 하고 진하게 풍겨왔다. “시몬이 그랬던 것처럼?” ‘!’ 놀라서 평정을 잃을 뻔했지만 급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신성연방에 갔다는 사실은 관련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세르네가 떠보는 것이라고 생각한 시몬은 애써 태연한 척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농담으로 알아들을게.” “진담이에요.” 세르네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특유의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네 생애의 비밀 때문에 간 거야?” “그런 이유도 있죠.” 세르네 아인다르크는 신성연방에서 태어났지만, 상아탑주에 거두어져 네크로맨서가 된 케이스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궁금해했고, 어쩌면 자신을 버린 신성연방 사회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신성연방에 간 게 아니라 더 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네라면 신성연방에서 칠흑을 숨길 수 있을 거고.’ “우훗.” 세르네는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시몬의 입장에서도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서로 비밀을 품은 채 경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시몬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로레인에 대해서는 들었지?” “네, 들었어요.”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 세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변덕쟁이 공주님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직위의 무게감에 짓눌렸을 수도 있죠.” 그녀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추측을 해보자면― 나처럼 생애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뭐?” “내 이능도 그렇지만 그 여자의 이능, 처음 본 순간부터 수상쩍다고 했어요.” 세르네가 무섭게 미소 지었다. “마계의 문을 여는 이능이라니, 그런 섬뜩한 힘을 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걸까요? 정말 이능은 맞는 걸까요? 결사가 여는 포탈과 느낌이 비슷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가 2학년 때부터 차고 다니던 그 검은색 초크 목걸이.” 세르네가 자신의 목을 쓱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네프티스가 ‘이능에 의존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게 하려고 그걸 착용하도록 명령한 걸까요?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요?” “비약은 그만둬, 세르네.” 시몬이 딱딱하게 말하자, 세르네가 후후 하고 웃으며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제 이야기보단 남의 소문이 더 재밌네요.” “……모르는 이야기를 함부로 넘겨짚지는 마.” 시몬은 그렇게 말하며 교과서를 꺼냈다. “조자앙! 안녕! 방학 잘 보냈지?” 이번엔 소환학과의 활력소로 통하는 에슈 아르젤이 감귤색 단발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그 옆에는 토토와 피츠제럴드도 함께였다. “걱정해 준 덕분에 잘 보냈어. 토토랑 피츠제럴드도 오랜만이야.” “안녕 시몬!” 토토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시몬, 아침 조례에 불참한 걸 보니 어젯밤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나 보더군.”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땀을 삐질 흘렸다. “조, 조례를 했었구나.” “사감 선생님께는 내가 학생회 업무 때문에 일찍 나갔다고 보고해 뒀다. 앞으로는 미리미리 말해줬으면 한다.” “아, 고마워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가 학과대표가 되니 이렇게 든든할 줄 몰랐다. 피츠제럴드는 토토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고,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강의실로 들어왔다. 곳곳에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화이트!’ 결사의 실험체였지만 키젠 학생으로서 활동 중인 화이트도 무사히 키젠에 복귀한 모습이었다. 창밖의 새를 멍하니 바라보는 습관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다른 동기들이 다가와 말을 걸면 이야기를 듣고 대꾸를 하는 등 예전보다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헥토르와 그의 무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다만 헥토르는 전체적으로 텐션이 낮고 진중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다 시몬과 시선이 마주치자 전처럼 화를 내진 않고, 그저 쓱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얘들아, 교수님 들어오셔!” 한 학생의 말과 함께 모두가 빠르게 제자리에 앉았다. 시몬이 주위를 한번 쭉 살펴보았다. ‘정원은 34명이구나.’ 처음 이 학과를 선택했을 때는 강의실이 북적거렸는데, 이제는 빈자리가 체감이 될 정도로 확연히 인원이 줄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빈자리는 바로 옆이었다. 늘 옆에 앉던 로레인의 자리. 시몬은 제인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잠시 후, 이제는 익숙한 얼굴인 소환학과 조교들이 먼저 들어와 도열했다. 뒤이어 소환학과 담당교수이자 시몬의 직속교수, 아론 데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면도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까슬까슬한 턱에, 후줄근한 셔츠와 반바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습관까지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달라졌다. “교수니임! 보고 싶었어요!” “방학 잘 보내셨어요?” 머리가 굵어진 3학년들이 긴장하기는커녕 먼저 아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론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 등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였다. 마침내 아론이 교단에 올라서서 말했다. “키젠의 마지막 학기에 온 걸 환영한다. 방학은 잘 보냈나?” 네-! 모두가 힘차게 대답했다. 아론은 강의실이 덥게 느껴졌는지 목의 갑갑한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며 말을 이었다. “놀랍게도, 이제 키젠 졸업까지 고작 반년 남았다. 이 치열하고 길었던 레이스도 곧 끝이 보이는군.” 곳곳에서 학생들이 ‘짧아요!’, ‘아쉬워요!’ 하고 외치기 시작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능청도 많이 늘었군.” “아하하하!” “다만 벌써 ‘끝’을 논하는 건 이르다. 제인 교수님께 들었겠지만 키젠의 마지막 학기는 어느 때보다 밀도 있고 힘겨울 거다. 어느 학기보다 운이 따라줘야 하고, 생전 처음 겪는 난관을 넘어서야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숱한 시련을 넘어온 너희라면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키젠 3학년 2학기. 이제는 정말로 진짜들만 남았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은 모두가 갖고 있다. 그만큼 100명 안에 들어 키젠을 정식으로 졸업하고자 하는 욕망도 강했다. ‘판타서스 선배님도 100명 중에 99등으로 졸업하셨다고 했지.’ 물론 시몬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키젠의 졸업은 아예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험이 될지도 몰랐다. “전체적인 개요는 개학식에서 제인 교수님께 들었을 거다. 조금 더 구체적인 커리큘럼을 설명하기 전에-” 아론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바뀐 석차와 성적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겠다. 너희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명확히 인지해야겠지.” 모두의 얼굴에 웃음기가 일제히 사라지며 공기가 긴장감으로 훅 하고 덥혀졌다. * * * 같은 시각, 교수 휴게실. 벌컥 벌컥! 별야는 홀로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맹독학과는 두 시간 뒤에 첫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음주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붉어진 얼굴로 꺽 하고 트림을 한 그녀는 이내 혀를 끌끌 차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것 참.” 별야가 보고 있는 건 맹독학과의 석차와 성적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겨우 22명의 학생뿐이었다. 다른 학과에 비하면 생존자 수는 적은 편이었다. “……쉽지 않구만.” “별야 교수님!” 달칵! 휴게실 문이 열리며 맹독학과 수석조교가 걸어왔다. 뭐라 입을 떼려던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보고 펄쩍 뛰었다. “당장 두 시간 뒤에 수업인데 술을 드시다뇨!” “걱정 마, 걱정 마. 나 알잖아!” 별야가 능청스럽게 코에 한쪽 손을 올렸다. “코 한번 풀면 술독쯤은 싹 다 날아가는 거!” “……아무리 숙취를 날릴 수 있어도, 그사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까 주의해 주세요.” “알았다, 수석!” 별야가 두 팔을 벌렸다.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뒷골목 출신 교수 밑에서 고생했지? 한번 안아보자!” “네, 네?” “얼렁!” 별야가 버럭 소리 지르자 수석조교가 당황해하면서도 주춤주춤 품에 안겼다. 술 냄새가 훅 풍겼지만 그녀의 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별야가 옳지 옳지 하며 수석조교의 등을 토닥거렸다. “다른 학과보다 조금 덜 살아남았다고 자책하지 말자고! 이번 22명 전부 졸업자 100명 안에 집어넣으면 돼! 알았지?” 별야가 삐쭉삐쭉한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동공이 살짝 흔들린 수석조교가 이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클라우디아랑 다른 학생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나 이론에는 약한 거 알지? 다음 주에 있을 2차 DMAT 때 네 역할이 중요해. 거기서 떨어지는 새끼가 나오면 내가 줘패버린다고 해! 그다음 단체합숙에서 만회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수석조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조교들과 수업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교수님도 술 그만 드시구요.” “오냐.” 그렇게 수석조교가 휴게실을 떠났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별야는 그녀의 충고를 머릿속 외진 곳에 가둬놓고, 다시금 새로운 술을 꺼낼지 말지 고민했다. 똑똑. 그때 마침 새로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뻣뻣한 새 정장을 입고 머리에 커다란 땜빵이 난 남자가 들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어, 너는……!” 남자가 긴장한 듯 허리를 바짝 펴며 답했다. “새, 새로 부임한 신임 혈류학과 교수 아보 벨스만입니다! 선배 되시는 별야 교수님께 개인적으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오, 오오오! 어제 개학식에서 봤던 그 신참! 일루 와! 일루 와!” 별야가 손짓하자 아보가 굽신거리며 다가왔다. 마침 좋은 핑계가 생긴 별야는 곧바로 새 술병을 열고 빈 잔에 술을 쪼르륵 따랐다. “근데 너 수업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 “저, 저도 선배님처럼 오후 수업입니다! 인수인계를 받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하하!” 파하하! 선배님이란 호칭이 나쁘지 않다는 듯, 별야가 크게 웃으며 코끝을 문질렀다. “선배는 무슨, 그냥 남들처럼 교수라 불러! 아니면 누나도 좋고! 첫날이라 긴장되지? 한잔 쭉 들이켜!” “예!” “모르는 게 있음 뭐든지 물어봐!” 그렇게 두 사람이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하더니― “……끄윽.” 어느새 열 잔이 넘어가 버렸다. 물론 둘 다 일류 네크로맨서였고 숙취에 대한 대비책은 있었지만, 얼굴이 벌겋게 익고 말았다. 별야는 뒷골목을 전전하던 자신이 처음에 키젠에 들어왔을 때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야아, 딸꾹! 학생이 수업 보이콧을 했다고요?” “고럼 고럼! 근데 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별야가 이를 히죽 드러냈다. “그 말썽쟁이가 지금 내 직속제자이자 맹독학과의 총과대란 거쥐!” “우와아! 정말 대단합니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별야의 시선이 잠시 맹독학과의 석차표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그것을 옆으로 휙 밀어버렸다. “너희 혈류학과는 어떠냐?” “예?” “생존자 말이야. 생존자.” 그 말들은 아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19명입니다.” 그 말을 들은 별야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트림을 했다. 10명대는 처음이다. 혈류학과가 근래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들었지만 가히 처참한 성적표였다. 아보가 고개를 푹 숙이자 별야가 딸꾹거리며 외쳤다. “이봐, 네 잘못도 아닌데 고개 들어! 어?” “……예.” “너희 애들이 수는 적을지 몰라도 소수정예에 알짜배기들이야! 그…… 누구더라? 그래! 뱀파이어인 카미바레즈랑 혈묘족인 엘리시아! 걔들도 내 맹독학 수업 듣는데 그 둘이 진짜 잘해!” “가, 감사합니다!” “소수정예 학과끼리 잘해보자고!” 두 사람이 짠 하고 마지막 잔을 비웠다. 술병을 탈탈 털던 그녀가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신입, 기분도 꿀꿀한데 술기운도 털어버릴 겸 분위기 전환이나 하러 가자! 신고식이다!” “예, 예?” 별야가 이를 히죽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실력 좀 봐야지.” 그 말에 아보 벨스만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다치실지도 모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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